온산옛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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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마을


7.우봉

우봉리는 고종31(1894)소당포 혹은 소당개라는 이름으로 당포동에 속하여 있던 마을로서

1911년분리되어 우방이라 하였다가,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우봉리라 하였다.봉화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본동보다는 당월의 낫끗남쪽에 위치한 새바우(새바위)라는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고,

면적이 좁은 새바우에서 이주한 사람과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로 우방이란 마을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우봉 마을은 한때 전국에서 가장 어획고가 높은 복어 산지이기도 하다.그당시 전국에서

모여던 복어 잡이 배들로,복어를 매입하기위한 차량들로 북세통을이룬 부촌이었다.다양한 복어가

잡혔지만 주가 되는 것은 밀복이었다.

1977년 동해펄프가 건설되고 현제 마을은 바다까지 매립 신한기계가 들어와 있다.

우봉마을

목도부락



달포부락



달포부락


사진1.달포마을:

기록이전의 달포는 월포 혹은 송암이란 이름으로 구전 되어오다가

조선조 영조41(1764)에 달포라 하였고,행정구역 개편때인 1914년이후

송암으로,광복이후 달포라고 불렀다.달포라고 한 것은 마주하고있는 방어진에 이를 수 있는

포구라는 뜻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이외에도 뒷산에서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포구라는 뜻을 의미한다는 설이있다.또한 산 과 바다가 접하는 부분의 산비탈을 깍아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좁고 긴형세가 초승달처럼 생겼다고하여 달포라고 하였다는 설도있다.

우봉,당월.목도와 함께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달포의 멸치,칼치,복어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며,김이나 미역 같은 해초류도 풍부한 어촌이었다.한때는 300여세대가 모여 살던

큰 부락이었다.

 

달포부락


9.산암리

산암리는 숙종때까지는 관련기록이없고 단지 달포는 월포 혹은 송암이란 이름으로 구전 되어오다가

조선 영조41(1764)에 산하리,달포리,길리로 갈라져 청량면에 속해 있었다.

정조때(1777~1800는산하,달포,공기,로 순조10(1810)에는 공기리가 없어지고 산하,달포로

고종1(1864)에는 산하,달길,달포,정리로 고종31(1894)에는 산하동달포동,점리동으로 편성되어

달길 리가 달포동에 합속되었고 1911년 경술국치 다음해에 산하와 달포로 나뉘어져있다가 1914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여 현제 산암리라 하였다.지금은 국내굴지의

S-OIL회사가 입주해있다.


당월부락


사진3.당월

당월리는 인간이 정착하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 이전부터인 것 으로 추정된다

문헌에는고종31(1894)에 월천동 과 당포동으로 나누어져 있다가17년후인 1911

에는 다시 월천동 과당포동.월상동으로 분립되었다.이후 1914년행정구역 개편때에

월천동의 월 과 당포동의 당 을따서 오늘날의 당월이 되었다.이지역 재해를 방지하고

풍어를 기원하기위한 별신굿(정월보름날굿)은 울산은 물론 전국에서도 별신굿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기도 했다.

1915년엔 강양리에서 이전 개설한 온산면사무소가 중심부에 있었고 1949년에 설립된

온산파출소가북쪽에 있었으며,그옆에는 온산초등학교 당월분교가 있다가 19656

당월초등학교로 독립되었다.백사장 과 바위군락이 길게뻗은 해변의 중심부에 약300

가구가 부채꼴 모양으로 오민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만선의 기쁨을 풀어 놓던

당월 선착장옆으로는 1972년 설립인가된울주군 수산협동조합이 있어 어민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복어잡이로 유명 하지민 초여름 성수기를 맞는 당월의 곳바리(상어잡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지금은 19808월부터가동한 동해펄프주식회사와 한국제지주식회사와 하수

종말처리장등이 입주하여 있고 바다역시 계속 매립되고 있어 옛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당월부락


당월부락


대정리(고려아연,풍산부지)

사진4대정리

고종31(1894)처음으로 대안동 과 송정동이라는 지명이 기록에 남아있다.1911년에는

송정동,대안동,본내동이라이라 하였다가 그이후에 본내동을 보내동이라고 개칭하였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이들 3개동을 합하여 대정리라고 하였다.

지금 고려아연,LS니꼬동제련,풍산금속등이 들어서있다


대정리(고려아연,풍산부지)


덕신리신경부락(1970년대)


신경부락(온산읍덕신리)

올해로 온산국가공단고시(1974.4.1.)44주년을 맡고 있다.

<신경부락>

덕신리는 임진왜란(선조25~31년)때 신야전탄이란 이름으로 처음 기록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이마을의

명칭은 아마도 신야동,신밤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7년(1783)의 기록에는 신경리라 하였으며 고종31년(1894)에는 덕공,신경반장으로 갈라저

있다가,1911년에는 반장동이 없어지고 덕동,오산,신경의 3개동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에 3개동을 합하여 덕동의 덕과신경의신자를 따서 덕신리로 하였다.

덕신리는 본래 온양면에 속해 있었으나 1974년 온산국가공단 고시로 1975년10월1일 대통령령

제7818호에 의거청량면의 용암,학남과함께 온산에 편입 이속되었으며이후1977년울주군

조례제316호에 의거신경,신온,덕신리의 새 행정마을이되었다

덕신리(2007년)




목도부락


12.목도

목도는 동백섬을 가까이 하고있는 해안 마을이다.섬과육지의 곙계되는 지점을 목이라하니

섬의 목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이다.

고종31년에 발간된 구읍지에보면 도서 지방편에 목도라는 촌명이 명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숙종46(1720)에 해리라는 지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 기록상에 나타난 이마을의

맨처음 이름이다.

목도는 어류 집산지 또는 어업 전진 기지로 유명하였다.방어,삼치,암치,민어조기,뱅어,칼치등이

주종을 이루었고,일본에 수출도 하여 무역선이 목도 앞바다에 항상 정박해 있었다고한다.

이마을도 S-OIL부지에 속해있다.



10.산성

산성마을은 본래 남면에서 분류된 온산면에 속했는데,고종24(1887)에 온북면에

편입되었고,1911년에는 산성동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온북에서 다시온산으로 환원되었다.

마을 앞과 주변일대에 성터가 있다.이 성터를 두고 일설에는 7~8세기경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성터 안의 마을을 성안이라하고 그꼭대기를 성말랑이라 하였다.구전에 의하면 이마을에

처음에는 김씨와 있가 몇가구 살고 있었는데 모두 떠나가고 그 뒤를 이어 인동 장씨들리

살고 있다가 임진왜란때 피난을 떠난뒤부터 영월 엄씨 집성촌이 되었고 이주 전까지 60여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주민들은 거의가 농업에 종사 하였고 엄건영이란 천석꾼이

있었다고 한다.마을의 위치는 동쪽으로 대정리와,남으로는 원산리 성곡과 삼평리,

서쪽은덕신,북쪽은 석당리와 경계한 산골마을이다


산성부락


우봉부락


우봉부락


석당(현이수화학부지)

처용부락(학남)

8.처용마을

조선정조때 처용이라하다가 고종원년(1864)에는 처용리 와 신기리로 다시 고종31(1894)에는

처용동 과 신기동으로나뉘어 졌던 마을이다.본래는 청량면 지역이었으나 1924년 온산으로 이속되었고

191441일 행정구역 개편때 처용,신기,학동을 합하여 처용리라 하였다.처용이라 함은 처용설화에

등장하는 처용랑에서 유래된 것이다.신라의헌강왕이 동왕5

(879)에 동부주,군을 손행할 때 개운포의 처용암에서 처용이 출현하여 서울로들어가서 왕정을

보좌하였다.그 처용암이 처용리 앞바다에있기 때문에 이마을 이름을 처용리라 하였다.


춘도섬


11.동백섬(춘도섬)

이섬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동백이 섬 가득하므로 동백도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동백섬의 이름으로는

죽도,목도,춘도섬등 여러 가지로 불려지고 있다. 죽도는 신라시대부터 이섬에서 생산되는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조공으로바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도는 섬의 모습이 고기의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춘도섬은 춘도공원이라고 하눈 것은 일본인들이 방도리에 거주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1962년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 천연기념물65호로 지정된 이섬의 동백을 포함한

상록수림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강풍을 막아주고 어패류가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어부림이기도 하며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서만 자생하는것들로 학술적 가치또한 매우 높다.

이때부터 공식적인 명칭은 목도상록수림이되었다.



춘도섬